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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창덕궁
    ★고궁·사찰·성당/고궁 2007. 9. 3. 23:28

     

    창덕궁(비원포함) (昌德宮(秘苑包含)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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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비가 간간이 내리는 창덕궁의 돈화문을 들어 서면서 가이드의 안내를 받습니다. 까마득히 잊었든 기억을 되집어 보는 역사의 흔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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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궁에는 북에서 발원하여 외당(外堂)을 돌아 흐르는 명당수가 있고, 이 명당수 위에 석교(石橋)가 설치되어 있다.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 창덕궁의 금천교 등이 그것이다. 금천교는 길이 12.9m, 너비 12.5m로 1411년에 조성되어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화면의 용은 금천교에 새겨진 것이다. 금천교는 교각을 2개의 홍예(虹霓)로 구성하였는데, 물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홍예를 틀었으며 양쪽 교대(橋臺)를 석성(石城)처럼 쌓았다. 중앙에 홍예가 모이는 곳에 큼직한 홍예 기석(基石)을 놓아 지복석(地覆石)을 삼았으며, 하마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용의 형상은 마치 귀면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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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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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전은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탁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색의 양탄자를 깔았고 천장에서 멋진 단청을 볼 수 있다. 선정전의 기와는 청색 유리기와인데, 강화에서 육연 스님이 굽던 계열의 기와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다른 건물에도 있었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고, 조선 중기 건축재료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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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왕과 왕비의 침실을 대조전이라 이름 지은 것 또한 의미를 부여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백야의 생각)

    임금님의 침실인 대조전의 지붕 기와에는 일반 기와집 건물처럼 맨위의 이음새 부분에 용마루가

    없는 것도 특이하게 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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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 앞의 네 귀퉁이의 가마솥 같은 것은 목조 건물의 화재에 대비하여 늘 물을 채워 놓는 일종의 방화

    수를 저장용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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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님의 침실 대조전의 단청이 유난히도 더욱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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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의  뒷뜨락 지하를 뚫고 굴뚝을 세웠답니다..... 물론 배기 가스도 줄여 주는 역할을 했겠다는 생각...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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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에서 후원(비원)으로 들어 갑니다. 옛날 임금님이 후원으로 산책을 하러 나가시든 문을 통하여....

    서울의 중심부에 10만여평의 자연 보존이 잘 되여 있는 후원(비원)을 들어 서는 기분....설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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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연못은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 조성되었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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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정은(1792년) +십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을 한칸식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잿빛 두루미 한 마리가 연못 바위 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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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수문은 주합루의 정문으로 물은 왕을, 물고기는 신하를 비유하여

    군신간의 융화관계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수문으로는 왕이, 그 옆의 작은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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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합루는(1776년) 정조의 개혁정치와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의 산실이다.

    이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규장각서고이고 위층은 열람실이다.

    주합루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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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당은 1692년에 재건된 건물로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임금이 직접 참가한 가운데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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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02) 창덕궁

     

    아침부터 간간히 비가 내리는 산행길 발길을 돌려 고궁을 찾기로 마음을

    돌려 창덕궁에 도착 합니다.

    시간대별로 구룹을 만들이 가이드의 안내로 시작 되는

    창덕궁 답사..

    참으로 오랜만에 찾는 창덕궁이기에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까맣게 잊어가든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 보는 기분은 산행 못지 않게 좋기만 합니다.

     

    창덕궁을 돌아 후원(비원)으로 들어 가는 쪽문을 통과 하면서 신비롭도록

    잘 보존되여 있는 비원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봅니다.

     

    이슬비 촉촉하게 내리는 비원의 우거진 숲길과 연못가를 돌아 보면서

    임금님이 된 기분에 젖어 보는 멋스러움도

    함께 해 봅니다.

     

    -= IMAGE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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